현대자동차와 기아가 전기차 전환 속도 조절과 함께 하이브리드 중심의 중기 전략을 본격화한다. 두 브랜드는 2030년까지 하이브리드 라인업을 현재 대비 약 2배 수준인 총 28종으로 확대하며, 전동화 시장에서 안정적 성장 기반을 구축한다는 방침이다.

현대차 팰리세이드 하이브리드

전기차 캐즘 속 선택, 하이브리드로 방향 전환

현대차그룹의 하이브리드 확대 전략은 전기차 시장의 일시적 수요 정체 현상인 '전기차 캐즘'에 대한 현실적 대응이다. 현대차는 지난 9월 18일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개최한 '2025 CEO 인베스터 데이'를 통해 이 같은 중장기 전략을 공식화했다.

현대차는 현재 8종인 하이브리드 라인업을 2030년까지 18종 이상으로 확대한다. 쏘나타, 아반떼, 그랜저 등 세단 라인과 코나, 투싼, 싼타페, 팰리세이드 등 SUV 라인, 그리고 스타리아 등 다목적차량에 이미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적용한 상태다. 이를 엔트리부터 중형, 대형, 럭셔리 전 차급으로 확대해 거의 모든 차종에서 하이브리드 선택지를 제공하겠다는 계획이다.

기아는 6종에서 10종으로 라인업을 늘린다. 현재 K5, K8 세단과 니로, 스포티지, 쏘렌토 SUV, 카니발 등에 하이브리드 모델을 운영 중이며, 지난 10일 전면 개편된 셀토스에도 하이브리드를 추가하며 7종 체제로 진입했다. 레이, 모닝 등 경형 라인까지 하이브리드 적용이 검토되고 있어 대중성을 갖춘 전 차급 하이브리드 구성이 가능해진다.

기아 셀토스 하이브리드
기아 셀토스 하이브리드

제네시스 하이브리드 첫 출격, 럭셔리 전동화 본격화

현대차그룹의 이번 전략에서 가장 주목받는 부분은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의 하이브리드 진입이다. 현대차는 2026년 후륜구동 기반 제네시스 하이브리드 모델을 출시한다. 브랜드 최초의 하이브리드이자 그룹 차원에서도 처음 개발되는 후륜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적용된다.

구체적인 첫 모델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으나, 시장에서는 GV80, G80, GV70 등 주력 라인업 중 하나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특히 GV80 하이브리드는 2026년 하반기 울산 공장에서 첫 양산이 시작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이를 시작으로 제네시스는 주요 모델에 순차적으로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을 탑재하며 럭셔리 세그먼트에서도 전동화 경쟁력을 강화할 방침이다.

제네시스 GV80
제네시스 GV80

차세대 TMED-II 시스템, 연비·성능 동시 개선

현대차그룹은 하이브리드 시스템 기술 고도화에도 집중하고 있다. 올해 출시된 팰리세이드 하이브리드부터 적용된 차세대 하이브리드 시스템 'TMED-II'가 핵심이다.

TMED-II는 엔진 크랭크샤프트에 연결된 P1 모터와 변속기 입력축에 연결된 P2 모터를 조합한 듀얼 모터 구조다. P1은 시동과 발전을 담당하고, P2는 주행 구동력을 제공하며, 두 모터가 협력해 성능과 효율을 동시에 끌어올린다. 기존 단일 모터 방식 대비 연비는 최대 45%, 출력은 19% 향상됐다.

주행 중 발생하는 회생 제동 에너지와 내연기관 발전으로 배터리를 상시 충전해 전기 모드 주행 거리를 늘리고, 엔진 시동 없이도 전기를 이용할 수 있는 스테이(Stay) 모드와 V2L(Vehicle To Load) 기능 등 전기차 수준의 편의 기능도 제공한다. 현대차는 이 시스템을 향후 대부분의 하이브리드 라인업에 확대 적용할 예정이다.


미국 시장 성과, 하이브리드 판매 급증

현대차·기아의 하이브리드 강화 전략은 실제 판매 성과로 입증되고 있다. 2025년 11월 미국 시장에서 두 브랜드의 하이브리드 판매량은 3만6172대로 전년 동월 대비 49% 증가했다. 현대차는 2만377대로 37%, 기아는 1만5795대로 67% 각각 늘며 역대 최대 기록을 경신했다.

2025년 1월부터 11월까지 누적 판매량에서도 현대차는 82만2756대로 전년 대비 8% 증가하며 미국 시장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특히 하이브리드 모델이 전체 판매 증가를 견인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아 역시 텔루라이드, 스포티지 등 주력 SUV 라인의 하이브리드 버전이 판매 증가에 기여했다.

현대차그룹은 미국 현지 공장에서 하이브리드 차량 생산도 확대하고 있다. 관세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현지 수요에 신속히 대응하기 위한 조치다. 2026년 출시 예정인 텔루라이드 2세대 모델에도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이 탑재되며, 미국 시장 공략의 핵심 전략 차량으로 자리매김할 전망이다.


전기차와 병행 전략, 유연한 전동화 로드맵

하이브리드 확대가 전기차 전략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차그룹은 하이브리드와 전기차를 동시에 발전시키는 '투 트랙 전략'을 추진 중이다. 현대차는 2030년까지 친환경차 판매 목표를 563만대로 설정했으며, 이 중 하이브리드와 전기차가 각각 적절한 비중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기아는 EV 시리즈를 통해 순수 전기차 라인업을 지속 확대하고 있다. EV6, EV9, EV3, EV4, EV5 등 5종의 전기차와 목적기반차량(PBV) PV5를 이미 출시했으며, 향후에도 EV 라인을 지속적으로 늘릴 계획이다. 송호성 기아 사장은 "전기차를 사고 싶지만 여러 이유로 망설이는 고객에게 하이브리드가 전기차로 가기 전 단계의 가교 역할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럽에서는 전기차 중심, 미국에서는 하이브리드 중심의 지역 맞춤형 전략도 병행된다. 유럽연합(EU)이 2035년 내연기관 판매 금지 계획을 일부 유보하면서 하이브리드 허용 기조로 선회한 점도 현대차그룹에 유리한 환경 변화로 작용한다.


시장 영향과 향후 과제

현대차·기아의 하이브리드 28종 체제 구축은 국내 자동차 시장 구조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2025년 1~11월 기준 두 브랜드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92%에 달한다. 하이브리드 라인업이 전 차급으로 확대되면 소비자 선택폭이 넓어지면서 내수 시장 장악력은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도 하이브리드 강화에 나서고 있어 경쟁은 치열해질 전망이다. 도요타, 혼다 등 일본 브랜드는 이미 하이브리드 기술 축적이 오래됐고, 폭스바겐, BMW 등 유럽 브랜드들도 하이브리드 라인업을 확대하는 추세다. 현대차그룹은 차세대 TMED-II 시스템과 후륜 하이브리드 등 차별화된 기술력으로 경쟁 우위를 확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파워트레인 생산 능력 확충도 중요하다. 기아는 2030년까지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 연간 90만대 이상 공급 능력을 확보할 계획이며, 현대차 역시 국내외 생산 거점에서 하이브리드 생산 설비를 지속 증설하고 있다. 수요 증가에 맞춰 안정적인 공급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라인업 확대 전략의 성패를 좌우할 요소다.

현대차그룹의 2030년 하이브리드 28종 체제는 전기차 전환기를 거치는 자동차 산업에서 유연성과 현실성을 갖춘 전략으로 평가받는다. 전기차 인프라와 소비자 수용성이 성숙하는 동안 하이브리드로 시장을 선점하고, 장기적으로는 전기차와 수소차 등 다양한 전동화 옵션을 제공하는 포트폴리오 완성이 목표다.